본문 바로가기

스타

김창완 동생 김창익 사망원인/부인(아내)이영숙과 김창훈


산울림은 김창완 삼형제가 만든 가족 밴드입니다.

1970년대 말과 80년초에 큰 인기를 끌었던 그룹이었죠.


김창완 셋째 동생 김창익의 사망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 정확한 사망원인과 캐나다 이민 배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김창완 삼형제 사진


산울림의 막내 김창익은 1957년 5월 17일 태어나서 2008년 1월 29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합니다(사고 당시 향년 52살이었죠)(김창익 별세 나이).

(김창익 학력 학벌)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1977년부터 큰형인 김창완과 둘째 형인 김창훈과 더불어 산울림 활동을 합니다.

다만 전문적인 뮤지션 길로 나선 김창완과 달리 그와 둘째는 직장인의 길을 선택했고, 이것이 1983년 산울림 해체 원인이 됩니다.


물론 김창완이 계속 음악 활동을 했고, 김창훈과 김창익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산울림으로 복귀를 했기에 계속 그들의 음악이 담긴 앨범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이전보다 뜸해진 것은 어쩔 수가 없게 됩니다.


(산울림과 김창완 프로필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14/05/05 - 김창완 아내(부인)강귀빈- 여자에게 따끔한 충고를


김창익 사진


산울림의 삼형제는 모두 명문대학 출신들입니다.

큰형 김창완이 서울대학교 잠사학과를 나왔고, 둘째 김창훈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식품공학과를, 셋째 김창익은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나옵니다.


그리고 졸업후에 둘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기업체에 취직을 하게 되죠.

김창익의 경우는 1983년 대우자동차에서 근무를 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로 회사를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캐나다 이민을 선택하게 되죠(김창익 직업).


역시 외환위기가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죠.

사회적인 엘리트로 꼽히던 김창익 역시 그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죠.

이때 많은 가정들이 이혼 등으로 해체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무능력한 정책 결정권자 때문에 온 국민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죠.



캐나다에서 거의 십년간 이민생활을 하던 김창익은 캐나다 벤쿠버의 한 식품 도매업체(이름 21센추리 트레이딩)의 이사로 근무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2008년 1월 29일 사고를 당하게 되죠.


김창익 젊은 시절 과거 사진


당시 이 회사 사장이 말한 사건에 대한 재구성입니다.

서명석 대표: "사고당일 아침 직원 조회시간에 김 이사(김창익)는 '전날부터 내린 눈으로 지게차 작업이 위험해 직원들에게 절대로 밖으로 지게차를 가지고 나가지 마라'고 지시했었다."


서명석 대표: "그리고 지난 29일(현지시각) 낮 12시쯤 화물이 도착하자, 고인은 직원들의 안전을 우려, 직접 지게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서명석 대표: "경찰과 근로자보상위원회(WCB) 관계자와 CCTV 녹화 내용을 확인한 결과 김 이사가 눈으로 화물을 내리면서 어려움을 겪은 후 지게차의 포오크를 맨 위쪽까지 들어 올린 상태에서 밑으로 내리지 않은 채 움직이다가 경사진 외부 작업장의 눈길에 지게차가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했다."


결국 김창익은 지게차에 깔려 큰 부상을 당했고,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지만 출혈과다로 사망하게 됩니다(김창완 동생 김창익 사망원인).


직원들의 안전을 우려해서 본인이 직접 지게차를 몰다가 사고가 났으니, 더욱더 안타깝네요.



한편, 김창익은 이영숙과 결혼해서 두명의 아들을 둔 상태입니다(이름은 김신환, 김신영).(김창익 아내(부인) 이영숙)(김창익 배우자 와이프)(김창익 자녀 자식)(김창익 가족 관계).


김창익은 평소에도 조용한 성격이고 또 부인이 일반인이었기에 자신의 결혼식을 크게 알리지 않고 조촐하게 치룹니다(김창익 사별).


반면에 둘째 형인 김창훈의 경우는 유명 아나운서와 결혼을 했는데, 그 인연이 묘합니다.

1981년 맏형 김창완은 KBS라디오의 11팝스를 김미회 아나운서와 같이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7월 군대를 제대한 둘째 동생 김창훈이 게스트로 나왔고, 김창훈과 김미회는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약 1년간 사귄 두 사람은 1982년 10월 결혼식을 올립니다(김창훈 아내 부인 배우자)(나이차이는 김창훈이 2살 연상).



당시까지 김미회 아나운서는 KBS1TV의 세계는 지금, 2TV의 9시 스포츠의 MC를 맡는 등, 실력 있는 아나운서 중의 한명이었죠.

그리고 이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사실 김창훈이 김완선의 1집 '오늘밤'과 2집 '나홀로 뜰앞에서'를 작사 작곡했습니다. 음악에 대해서 큰형 김창완에 못지 않은 재능이었는데, 아마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음악적으로 더 큰 업적을 쌓았을 것 같습니다.



(맏형 김창완의 러브스토리와 결혼이야기는 이전 글에서 언급됨)

(이전 글 새창보기)

2014/05/05 - 김창완 아내(부인)강귀빈- 여자에게 따끔한 충고를


(참고로 김창훈의 직업은 미국 현지법인 해태아메리카를 거쳐 미국 CJ 푸드 부사장 등을 역임합니다)



어쨌든 김창완은 막내 동생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시 김창완이 막내 동생을 떠나보내며 쓴 편지는 지금 읽어도 큰 감동을 줍니다.


김창완: "‘창익아, 창익아, 내 동생 창익아’... 막내 김창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무력감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하지만 평소에 늘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기 원했던 고인의 향기가 크나큰 슬픔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웃는 드러머 김창익을 사랑한 모든 분들을 위로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사랑하겠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행복하도록 사랑하겠다. 천국에서 웃으며 드럼을 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이렇게 동생이 떠날 줄 몰랐던 형이…"


동생의 죽음 당시 거의 폐인처럼 된 김창완 사진



그리고 김창완의 이전 글에서 언급되다시피 김창완은 거의 자폐아로 자랄 정도로 정신 세계가 일반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감수성이 크게 예민한 그는 동생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항상 괴로움 속에 살고 있죠.


김창완: "(친동생이 사망했을 때) 형제는 한 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개체가 모여 형제가 된 게 아니라 형제는 한 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냥 사지가 절단됐다고 생각하면 딱 맞을 것 같다."


김창완: "형제를 잃기 전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가 됐든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랐다."


김창완: "‘세월이 약이다’는 말이 있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난 안 잊는다.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든 애인이든 세월로 씻어서 잊으려고 하기 보다는 고이 간직해서 진주알을 만드는 것도 방법 아닌가 싶다."


김창완: "통증을 피할 마음 없다. 언제까지고 내 마음이 계속 통증을 느낀대도 괜찮다. 아프면 아픈 거다. 그러면 작품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작품을 하는 동안은 잠시 잊을 수 있고..."



아마 친인을 잃어본 사람만이 김창완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창완은 인을 잃은 슬픔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하는데, 이런 감정을 작품으로 만들려는 그의 고통이 너무 큰 것 같네요.

그렇다고 이것을 피한다고 감수성이 예민한 김창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예술가들의 고통이 작품으로 잘 승화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달래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또 그것이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겠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