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인 이야기

현대 왕자의 난과 정주영 정몽구 정몽헌 정주영의 마지막 꿈에 대하여 적기 전에, 먼저 현대 가문의 왕자의 난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네요. 지난 2000년 정주영의 아들들이 현대그룹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난(?)을 일으킵니다. 원래 정주영은 장남인 정몽구에게는 현대자동차그룹을 (원래 정주영 장남인 정몽필이 있었지만 이른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을 했고, 이후 정몽구가 장남 취급을 받음), 그리고 5남 정몽헌에게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 등을, 6남 정몽준에게는 현대 중공업을 각각 물려줄 계획이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그외에도 3남 정몽근에게는 현대백화점 등의 유통 부문을, 4담 정몽우에게는 현대 알루미늄 등을, 7남 정몽윤과 8남 정몽일에게는 현대의 금융계열사를 물려줌) 그런데 당시만 해도 현대의 주력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였고, .. 더보기
정주영과 이병철의 차이점 여기서 정주영의 도덕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정주영과 이병철은 똑같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이병철의 사업보국"기업은 인류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업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스폰서 링크) . . 이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자리입니다.이병철은 기업이 발전하여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이전의 이병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병철은 '삼분사건', '사카린 밀수 사건' 등 돈을 위하여 도덕심을 버린 행적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쩌면 사업보국이란 대의명분일 뿐, 그에게는 '돈을 버는 것만이 지상의 가치'가 아니었던가 하네요. . . 게다가 현재 이병철의 후손인 이건희와 이재용의 삼성그룹은 해외 설비 투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정주영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유 그리고 1992년 정주영은 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김동길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대표 최고위원으로 선출이 되었죠. 정주영: "5공화국 (전두환 정권) 아래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었겠지만,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스폰서 링크) . . 이처럼 정주영은 정치권의 압박때문에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놓고 금권선거를 자행합니다.(원래 정주영 역시 국보위때문에 자동차와 중공업중에서 하나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받았음) 현대그룹 임직원들과 가족들을 노골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에, 당시 통일국민당 당원 수가 1200만명이나 될 정도였죠. 하지만 사람들은 금권 선거 및 재벌 정주영에 대한 반발감이 있었고, 대통령 선거에서 최종 특표수는 3.. 더보기
빨간 골프공과 정주영 아무리 바위와 자갈들을 짚어넣어도 급류가 모든 것을 앗아갔기 때문이죠. 현대건설 임직원: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해외 건설사에 컨설팅 의뢰도 해보고 학계에도 문의를 해봤지만, 모두가 속수무책입니다." 정주영: "그렇다면 대형 배를 좌초시켜서 급류를 막는 것은 어떤가?" (스폰서 링크) . . 결국 정주영은 당시 23만톤급의 유조선을 마지막 방조제로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원래는 고철로 팔기 위하여 30억원에 사들인 낡은 유조선이었음) 이 유조선이 좌초되면서 급류를 막았고, 드디어 서산 간척지 사업이 완공이 된 것이죠. 이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라고 불리면서 미국의 타임지와 뉴스위크 등에도 소개가 됩니다.(당시 정주영 나이가 70살이었음. 이 나이에 이런 획기적인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 더보기
서울 88올림픽과 정주영의 승부수 1980년대의 정주영의 대표적인 업적은, 현대그룹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1981년에, 88 서울올림픽 유치 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서 올림픽 유치에 밑거름이 되었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다음에는 '올림픽 조직 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서 서울올림픽이 제대로 개최되도록 역량을 총동원합니다.(스폰서 링크) . . 당시 관계자: "서울에 올림픽을 유치하자는데 서울시가 전혀 나서지 않았다. 올림픽 전시관을 개관하는 데 당시 서울 시장이 불참할 정도였다." 당시 관계자: "이미 일본 나고야로 개최지가 일본 나고야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정주영회장이 나선다는 말에 '망신만 당할 것이다.'라는 비웃음만 팽배했다." 당시 관계자: "서울올림픽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남북 분단 상황이.. 더보기
아산 정주영의 창조적인 사고방식의 비밀 그런데 이 공사에 성공한 것에는, 정주영 특유의 '창조적인 사고방식'이 작용하게 됩니다. (아산 정주영 공법 사건) 정주영: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자재를 빨리 수송하는 방법밖에 없다. 울산에서 철구조물들을 전부 제작해서 해상으로 운반하자." (스폰서 링크) . . 결국 현대는 당시 울산에서 89개의 철 구조물 '자켓'을 미리 제작해서 해상으로 수송을 하게 됩니다.(자켓 하나의 무게가 550톤이고 높이는 36미터로 10층짜리 빌딩과 맞먹음)(당시 현대는 바지선을 서로 연결하여 이런 자켓을 해상으로 수송했고, 사람들은 이것을 '뗏못 수송 작전'이라고 불렀음) 당시 바지선으로 자켓을 운반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아무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고, 또한, 세계 최대의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더보기
정주영 회장과 동생 정인영 한라그룹의 결별 이유 하지만 당시 현대건설 내부에서는 대부분이 정주영의 결정에 반대를 합니다.특히, 50년대부터 현대건설에서 일을 했고, 당시에는 현대건설의 해외건설담당 부사장을 맡고 있었던 정인영 (정주영의 친아우)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합니다. (스폰서 링크) . . "회장님(아우 정인영이 형 정주영을 부르는 호칭, 정주영의 아우나 아내도 정주영을 보통 회장이라고 불렀음), 저희는 반대입니다. 그건 회사를 망하게 하는 욕심입니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런 아우와 주변 임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동 진출을 추진하게 되었죠. (결국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정주영과 정인영이 갈라서게 되고, 정인영은 한라그룹을 창건하게 됨)당시 중동 건설 시장은 선진국들의 대표적인 건설, 토목, 엔지니어링 회사들의 독무대였고, 정인영을 비롯한 .. 더보기
중동에 진출한 정주영의 신의 한수 결국 정주영은 포드사와 결별을 선언하고 단독으로 자동차 공장을 만들기 시작하게 되었죠. (1974년 7월) 아마 정주영은 조선소를 막 성공한 이후에 자신감에 충만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현대의 자동차공장은 연간 5만 6천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었는데, 금액만으로 따지면 '조선소'보다 더 큰 모험이었죠. (스폰서 링크) . . 정주영: "제가 무모하다고요? 난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적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것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만, 사실 (자동차 공장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1975년 현대는 자동차 포니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76년부터 판매를 시작했는데, 결국 포니 덕분에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두번째 (일본 다음으)로 독자적인 자동차를 .. 더보기
자동차 독자 개발과 정주영의 포드 결별 이유 조선소 다음의 정주영 업적은 자동차 독자 모델 개발이었습니다.원래 정주영의 제대로 된 첫 사업이 바로 '자동차 수리 사업'이었기에, 정주영 본인부터가 자동차 엔진과 각 기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해박한 자동차 지식을 바탕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는데, 사실 자동차 수리와 자동차 제조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폰서 링크) . . 아무튼 정주영의 자동차 초창기 사업은 바로 미국 포드사의 합작 파트너사였습니다.원래 당시에는 '현대건설'이었기에, 포드사는 현대를 쳐다보지도 않았죠.오히려 '건설회사'가 자동차 사업을 한다고 제안을 해서 놀랄 정도였죠. 그런데 마침 포드사 부사장 일행이 한국의 합작사를 알아보기 위하여 방한하게 됩니다.이때 정주영은 포드 부사장 일행을 위하여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더보기
정주영 회장 업적의 진실과 거짓 아마 정주영은 후자였을 겁니다.당장 자신과 계약할 선주들을 찾아 헤맸으니까요. 물론 대다수의 선주들은 정주영의 제안을 거절했고,그 와중에 정주영은 그리스의 선박왕 리바노스를 만나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정주영: "다른 조선소보다 싼 값에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만든 선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런 정주영의 파격적인 제안과 열정에 리바노스 역시 감동을 받아서 결국 26만톤의 배를 2척이나 주문하게 됩니다. 결국 정주영은 이 계약서를 갖고 영국의 버클레이 은행으로 되돌아가서 자금을 지원받고 조선소를 만들면서 동시에 육지에서는 배를 건조하게 됩니다.(나중에 25만톤짜리 배는 어느 정도 만든 후에 도크에 넣음) 여기까지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정주영의 신화입니다.그런데.. 더보기
정주영 업적 현대조선소 건설의 일반적인 이야기 문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결코 정주영의 공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런 다음, 정주영의 두번째 업적은 현대조선소 건설인데, 사실 이 일화는 워낙에 유명하기에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의미로 다시 한번 제대로 짚을 필요가 있네요. (스폰서 링크) . . 우선, 당시 정주영은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배를 발주받습니다.1971년 9월 정주영은 사업계획서 한장과 조선소 건설 부지인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을 들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은행들을 만나서 자금지원을 요청했지만,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술력을 믿지 못했던 것이죠. (실제로 당시까지 우리나라는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톤급 선박이 최고였는데, 현대가 갑.. 더보기
정주영 일화 - 박정희 앞에서 졸다가 그렇다면, 정주영의 업적은 무엇이 있을까요? 정주영이 사업적으로 성공한 일들은 무척 많지만, 가장 큰 업적은 4가지를 꼽습니다. 첫번째는 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입니다.1968년 2월 착공해 2년5개월만인 1970년 5월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현대의 정주영을 비롯하여 16개 건설회사가 참여를 했는데, 이중에서 정주영의 활약상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스폰서 링크) . . 가장 긴 구간, 가장 어려운 구간을 맡아서 완공했고, 이 덕분에 경부고속도로는 70년대와 80년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정주영의 일화는 굉장히 많습니다. 평소처럼 지프차에서 잠을 자면서 작업을 진두했으며, 신출귀몰하게 현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직원들이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더보기
정주영과 김경희 탤런트의 만남 이것이 바로 정주영 회장과 김경희의 첫만남이었죠. 이후 정주영은 김경희에게 밥을 사준다는 핑계로 자주 만남을 가졌고, 결국에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김경희: "처음에는 아빠 (김경희가 정주영 회장을 부르는 호칭)가 결혼한 사실도 몰랐다." (스폰서 링크) . . 김경희: "우리 어머니로부터 결혼 승낙도 받았는데, 아빠 나이가 그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김경희: "아빠가 탤런트 생활을 반대하는 바람에 모 여대로 학적을 옮겼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대학원 과정 중에 미국으로 떠났다." . . 이처럼 김경희는 연예인이기는 했지만 정주영의 반대로 제대로 된 탤런트 생활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김경희의 프로필 역시 존재하지가 않죠. 아무튼 1978년과 1981년에 각각 딸을 낳은 김경희는 정주영의.. 더보기
정주영 여자관계와 부인 변중석의 반응 이것이 정몽준이 생모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털어놓은 것의 전부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상식과는 맞지 않지만, 이것 역시 시대적인 상황 및 변중석의 성품으로 이해를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정주영은 부인 변중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스폰서 링크) . . 정주영: "아내를 존경한다.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이, 평생토록 변함없는 점들을 존경한다." 정주영: "사실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도 할 수 없다." 정주영: "사실 내가 돈을 번 것도 모두 아내 덕택이었다. 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사실을 알았다." 변중석의 이런 '조용한 내조'가 훗날 현대가의 가풍이 되어서, 현대가 안주인들은 대체로 조용한 내조를 하게 됩니다. 아나운서 노현정 역시 현대가의 자제와.. 더보기
정주영의 여자들과 혼외자 정몽준 참고로 정주영 여자관계는 무척 복잡하고 미스테리합니다. 우선 정주영이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아들 중에) 막내인 정몽일만 '배다른 자식'이라고 공개한 적이 있었죠. (지난 1992년 대선 출마 당시에) (스폰서 링크) . . 하지만 정몽일외에도 정주영의 혼외자들은 상당수라는 것이 추정 가능합니다.일단 6남 정몽준 역시 혼외자중의 한명이죠. 원래 정주영과 국악인 안비취 (이미 작고) 사이에 난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정몽준 회장 생모 루머)지난 2002년 대선 당시에 어떤 기자가 정몽준에게 이를 직접 물어보기도 했죠. 이에 대하여 정몽준은 . . "아버님(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안비취씨를 좋아하셨다. 하지만 그 분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실 정몽준도 자신의 생모는 정확하게 모르는 .. 더보기
정주영 회장 아내 변중석 여사의 신혼생활 변중석: "(중략) 솔직히 생활이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고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어요." 이후 변중석은 남편과 평생을 함께 합니다.정주영이 자동차 정비사를 할 때는 이미 온 가족을 서울로 불러서 함께 살았는데, 당시 20여명의 대가족이 되었죠.(정주영의 동생들이 7명이고, 정주영과 변중석 사이에 아이들도 줄줄이 태어남) (스폰서 링크) . . 그런 대가족속에서 변중석은 시어머니와 함께 집안일을 했고, 또한 직접 밥과 반찬을 해서 자동차 정비소로 나르기도 합니다. 남편과 직원들의 밥을 직접 한 것이죠. 그리고 정주영이 모든 것을 잃었던 부산 피난 시절에는 직접 거리에서 포도 장사를 하기도 합니다. 변중석: "제가 마음이 약해서 물건 값도 잘 못 깎았어요. 포도장사를 할 때는 손님이 달라는 대로 다 주는 바람.. 더보기
정주영 부인 변중석 집안과 첫날밤 정주영 부인은 변중석 여사인데, 정주영 고향의 옆마을 출신이죠. 당시 정주영은 경성에서 쌀가게 점원으로 일을 하던 때였고, 둘의 중매는 정주영의 삼촌이 주도합니다. (정주영 회장 넷째 숙부가 당시 이웃마을이었던 변중석 여사와 같은 마을에 살았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주영 집안은 무척 가난했고, 정주영 아내 변중석 집안은 그나마 좀 사는 편이었죠. (스폰서 링크) . . 1939년 결혼 당시 정주영 나이는 25살, 변중석 나이는 19살이었습니다. 변중석: "아버지께서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방에서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죠." 변중석: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총각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확 열렸어요." 이때 변중.. 더보기
푸른 잔디를 깔고 난 뒤 정주영의 행동 를 한달만에 건설했고, 또한 부산 유엔군 묘지 보수 작업에 참가하게 됩니다. 당시 6.25때 전사한 미군과 유엔군을 안장한 묘지는 한겨울이었기에 무척 황량했습니다.그런 묘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와 유엔사절단이 방문하기로 했고, 미군측은 만리타국의 전쟁으로 전사한 병사들의 묘지가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그래서 '유엔군 묘지 언덕을 푸른 잔디로 깔아달라'라는 황당한 주문을 하게 된 것이죠.(미군 역시 한겨울에 이것이 '불가능한 주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미국내에서 반전 여론이 일어날까 경계하는 상황이었고, 또한 당시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음) 결국 정주영은 미군측으로부터 '푸르스름하게만.. 더보기
정주영 가계도와 동생 정인영 정세영 정신영 하지만 이 사업 역시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1942년 일제는 '기업정리령'을 발동했고, 결국 정주영은 공장을 빼앗기게 된 거죠. 이후 정주영은 홀동광산에서 광석을 운반하는 사업을 하면서 3년동안 근근히 버티게 됩니다. 그러다가 광복 후에는 건설사업까지 진출을 했는데, 한동안 잘 나가던 정주영도 다시 6.25로 모든 것을 잃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스폰서 링크) . . 당시 정주영은 모든 것이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미8군의 발주 공사를 맡게 됩니다. 여기서 정주영 동생들의 학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네요.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한 집안 형편상 정주영은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 되었습니다... 더보기
사업 초창기때 정주영 회장의 비밀 확실히 십대의 젊은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아닌가 하네요. 아무튼 마지막 4번째 가출때 정주영은 인천에서 부두노동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 (현재의 서울)으로 가서 쌀가게에 취직하게 됩니다.(스폰서 링크) . . 이때쯤에는 정주영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정주영 아버지도 아들에 대해서는 거의 반포기를 한 상태같네요.(정주영의 첫사랑은 나중에 정주영이 대북 사업을 하는 중요한 원동력중의 하나가 됩니다.) 이후 정주영은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지만, 성공만을 맛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정주영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쌀가게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점원이었던 정주영에게 쌀가게를 넘기게 됩니다. 쌀가게 주인집 아들은 여자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했던 반면에, 정주영은 '성실한 배달원', '장부를 쓸 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