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맴도는 사람들
서편제는 서편제(남도사람 1), 소리의 빛(남도사람 2), 선학동 나그네(남도사람 3), 새와 나무(남도사람 4), 다시 태어나는 말(남도사람 5)로 이어진 연작소설이다. 하지만 주요 내용은 앞의 세편에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
서편제는 서편제로, 선학동 나그네는 천녁학으로 임권택 감독에 의하여 각각 영화화되었고, 특히 서편제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바 있다. 여기서는 서편제 - 소리의 빛 - 선학동 나그네를 같이 보기로 하자.
[서편제]
소설의 주요 인물인 오빠와 여동생은 씨다른 오누이지간이다. 하지만 오빠는 자신의 어머니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그리고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하나뿐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의붓아버지를 증오한다. 그에 따라 소리와 북장단을 배워 주려는 의붓아버지를 죽이려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그와 여동생 곁을 떠난다.
나중에 사내는 우연히 주막집에서 소리를 하는 주모를 만난다. 이 주모는 그의 의붓아버지와 여동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여자다. 이 주모로부터 사내는 여동생이 아버지로부터 눈을 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주모는 아버지가 소리를 위해서, 그리고 가슴속에 한을 심어 주기 위하여 딸의 눈을 멀게 했다고 말하지만, 사내의 생각은 다르다. 바로 자신처럼 여동생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믿는다.
사내에게 있어서 소리는 원한과 동시에 증오의 대상인 햇덩이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그 소리 속에는 또한 육신의 힘을 빼앗고 살의를 누그러뜨리고 묘한 마력이 숨어 있다. 결국 사내는 의붓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그의 소리로부터 달아나고 만다.
[소리의 빛]
마침내 장님이 된 여동생을 만난 사내이지만, 자신이 오빠라는 사실은 굳이 내색하지 않고 그저 소리만 청해 듣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는데, 바로 여동생의 탄생 전과 간난 아기 때의 기억 없는 시절이다. 그리곤 이튿날 말없이 훌쩍 떠나버린다.
하지만 여동생은 이미 사내가 자신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소리와 밤새 어울려진 그의 북장단 솜씨가 이미 죽은 아버지의 솜씨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장님으로 만든 이유가 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음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비를 원망하는 기색은 없다.
여기서 여동생은 오빠의 햇덩이를 살기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바로 그 오빠는 햇덩이를 못견뎌했지만, 또한 그것을 쫓아 반평생을 헤매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갇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동생은 자신의 소리를 지켜주기 위하여 한을 없애지 않고 조용히 떠난 오빠처럼, 그녀 역시 오빠의 한을 지켜 주기 위해 평생 피해 다닐 결심을 한다.
[선학동 나그네]
선학동에는 한 가지 내력이 전해져온다. 관음봉의 산 그림자가 물이 든 포구에 다다르면 꼭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선학동으로 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포구의 물길이 막힌 이후로는 학은 더 이상 날아오르지 않는다.
사내는 여전히 여동생을 만나기 위하여 남도 땅을 떠돌다가, 예전에 의붓아버지와 여동생과 함께 방문했던 적이 있는 선학동에 도착한다. 하지만 여동생은 이미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묻기 위하여 다녀간 후였다.
그 여동생은 이미 지형이 바뀐 선학동에서 소리를 통하여 다시 학을 날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다니는 사내에게 말을 남긴다, 자신은 선학동의 학이 되어서 포구 물위를 끝없이 노닌다는 사실을.
보통 이 [서편제]라는 연작소설을 한국적인 가슴속에 어린 한과 그것을 승화시키는 예술혼(소리)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오히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즉 다가가고자 하나 갈 수 없고 떠나고자 하나 차마 발길을 옮길 수 없는 머뭇거림과 주저함에 중점을 두고 감상해도 좋다.
의붓아비를 죽이고자 했지만 끝내 죽이지 못한 사내, 소리를 들으면 몸에 힘이 풀릴 정도로 충격을 받지만 끝내 소리 대신에 북채만 쥐는 사내, 여동생에게 끝내 자신이 오라비임을 말하지 않는 사내였다.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오라비임을 처음부터 눈치 채지만, 한마디 하지 않고 소리와 북장구로만 대화한다. 그리고 오라비의 한을 지켜주기 위하여 평생 그를 피해 다닐 결심을 한다.
사내와 여동생뿐만이 아니다. 의붓아비 역시 사내의 살의를 눈치 채고 있지만, 그 앞에서 오히려 더 구성지게 소리를 한다. 그는 사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걸까?
오누이는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주기 겁나서 말을 못하거나 피해 다니는 건지 모른다. 하지만 의붓아비는 딸을 자신의 곁에 잡아두기 위하여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끝으로 이청준은 독자에게 그리 친절한 작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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