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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박칼린 부모님은 어린 박칼린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박칼린: "어린시절부터 우리 세 자매는 용모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부모님은 '너희는 살면서 두배로 힘들겠지만, 두배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무튼 이런 경험을 제외하고는 박칼린은 무척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부유한 아버지와 재능많은 어머니

특히 박칼린 어머니가 딸의 음악적인 재능을 한껏 북돋워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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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유라준) [Copyright ⓒ 유라준 yuraju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칼린: "엄마는 미국에서 소중히 간직해온 LP판 한 장을 한국으로 가져오셨다. 거기에 말러 교향곡 1번이 실려 있었는데 밤마다 그걸 틀어놓고 우리를 재웠다."


박칼린: "그리고 엄마는 빈소년합창단과 여러 발레 공연 등이 있을 때마다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박칼린: "또한 엄마는 외국 여자였지만 한국의 팔도 민요는 물론 가곡과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까지, 정말 한국 노래를 많이, 깊이 사랑하셨다."


박칼린: "그리고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엄마가 우리 세자매를 데리고 부산항 앞에 있는 씨맨스 클럽에 가셨다. 거기는 서양식 레스토랑이었는데, 우리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매주 그곳에 가신 것이다."


아마 박칼린 어머니가 리투아니아 태생의 이민자 출신이었기에, 이런 준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네요.


또한 박칼린은 8살때부터 화교 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어를 배우기도 합니다.


박칼린: "9살때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엄마는 10살 이전에 언어를 배우면, 배우는 속도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박칼린 어머니의 교육열은, 어느 한국의 어머니 못지 않은 것 같네요.



아무튼 박칼린은 영어를 자유자재로 쓰면서 미국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는데, 고등학교 여름방학때 한국 할머니 집으로 놀러왔다가 그냥 한국에 머물면서 고등학교 2학년을 보내게 되었죠. 아주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한국 문화에 대한 향수때문이었죠.


이때 박칼린은 연극반 활동을 했고, 음악을 맡았던 《대왕은 죽지 않는다》란 작품으로 고교경연대회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어릴 때부터 본인의 재능을 뽐냅니다.


이후 대학은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을 가게 되는데, 

이 시절, 아니 그보다 더 어릴 때부터 박칼린은 거칠 것이 없이 살고 있었죠.


박칼린: "어릴 때는 모하비 사막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동쪽에 있는 사막)에서 뱀을 잡으러 다녔어요. 뱀을 치워야 주변이 안전해지기도 했고, 또한 뱀을 잡아다 코리아타운에 팔면 50불을 받았어요."


박칼린: "언니랑 같이 뱀을 잡아다 냉동실에 쌓아두고 한두 마리씩 꺼내서 코리아타운에 내다 팔아서 용돈으로 썼어요."


박칼린: "10대 후반부터 몇 년동안 심각하게 말을 탔어요. 어른이 된 다음에도요. 예쁘게 승마하는 것 말고, 완전 서부식으로 농장에서 산으로 일주일 동안 소몰이하러 가고, 말 타는 시합도 했었고요. 당시에는 완전히 거친 카우걸이었죠."


박칼린: "어릴 때 농구와 승마도 했어요. 팀을 짜서 소 500마리를 몰아본 적도 있죠."


이때가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이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또한 박칼린은 파일럿이 되기 위하여 조종술을 배우기도 했죠.


박칼린: "20대에는 음악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파일럿이 되려고 비행 학교에 가기도 했어요. 음악보다 비행이 더 재미있었더라면 아마 조종사가 돼 있었을 거예요."


박칼린: "사실 그 전에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며 우주공학을 전공하는 학교로 옮기기도 했어요."


박칼린: "그런데 백인들로 가득 찬 답답한 캠퍼스가 싫어 여성 비행학교에서 1년간 조종 연수를 받으며 단독비행까지 통과했어요."


박칼린: "나중에 '명성황후' 음악감독 제의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규정 비행시간을 채우지 못해 조종 자격증을 따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죠."


이 시절은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박칼린이 한국에서 연극배우 생활을 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종사 학교에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박칼린의 이때 인생은 결코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뚜렷한 결과가 없이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그냥 포기한 것이었으니까요.


아무튼 박칼린이 이렇게 거칠 것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의 재력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네요.


그 외에도 박칼린 본인의 자유분방한 성정 역시 한몫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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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박칼린은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석사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때 박칼린은 통역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당시 명창 박동진을 우연히 만나서 사사를 하게 됩니다.


원래 박동진은 박칼린의 잠재력을 보고 인간문화재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외국인을 한국의 문화재로 등록해 매년 지원금을 줄 수는 없다'라는 답변을 해서 결국 포기하게 되었죠.


그리고 박칼린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어릴 때부터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고, 어떤 때는 카우걸이 되기도 하고 비행학교에서 파일럿 수업을 받기도 했고, 서울대 국악과에서 국악작곡 공부를 하면서 대금과 가야금도 배웠는데, 정말 다양한 활동을 했네요.


박칼린의 집안이 풍족했기에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때그때 박칼린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최선을 다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게다가 일부 서양인들은 동양 문화에 대하여 비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사실 박칼린은 어릴 때부터 부산에서 자랐기에, 이런 불합리한 우월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죠), 박칼린은 한국의 국악과 대금, 가야금을 비롯하여 한국 문화에도 깊이 빠져들었던 것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죠.



아무리 박칼린에게 음악적인 재능이 풍부해도, 그리고 부모가 교육을 아무리 잘 시켜도, 한국의 정서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박칼린은 뮤지컬 감독으로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박칼린의 굉장히 빠른 성공요인이 무엇인지,

겨우 이십대 초중반에 어떻게 뮤지컬 음악감독을 할 수 있었는지를, 짚어봅니다.


아무튼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박칼린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연극배우가 됩니다.

이때의 일들은 본인이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는데, 아마 위에서 언급했던 우주 비행사, 파일럿처럼 별안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나섰던 것이 아닌가 하네요.


혹은 고등학교때 연극배우로 활동을 했고, 고교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어릴 적의 추억이 그녀를 연극판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초창기 박칼린은 부산 레퍼토리시스템, 부산시립극단 등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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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박칼린은 전남편을 만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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