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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구인회 집안은 독립운동에 도움을 준 집안이기도 합니다.

우선 구인회 아버지 구재서는 1930년경에 의령 출신의 독립 운동가 구여순 선생을 통하여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 5천원을 지원했고,

구인회 본인도 1942년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독립운동자금 지원 요청에 흔쾌히 응하여 당시로는 거금 1만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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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만원이라는 돈도 거금이지만 (1931년 구인회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자본금 2000원으로 시작했음),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인회는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야겠다."라는 뜻을 가지고, 과감하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죠.


사실 일제 시대때 우리나라 사회 지도층의 행태는 극명하게 나뉩니다. 첫번째는 이시영 이회영 집안처럼 가산을 모두 팔아서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회 지도층이 있었는가 하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이나 동아일보 김성수 사장처럼 국내에서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한 친일파들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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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인회는 국내에 남아서 사업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자금을 몰래 지원하는 등, 당시 뜻만 있었다면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는 데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물론 구인회 역시 친일 행적 의혹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일례로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고, 진주 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고, 또한 위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위험'을 무릎쓰고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그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 수가 있죠.


또한, 구인회의 동업자 허씨 집안 역시 이런 특징들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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