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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업 역시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1942년 일제는 '기업정리령'을 발동했고, 결국 정주영은 공장을 빼앗기게 된 거죠.


이후 정주영은 홀동광산에서 광석을 운반하는 사업을 하면서 3년동안 근근히 버티게 됩니다.


그러다가 광복 후에는 건설사업까지 진출을 했는데, 한동안 잘 나가던 정주영도 다시 6.25로 모든 것을 잃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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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주영은 모든 것이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미8군의 발주 공사를 맡게 됩니다.


여기서 정주영 동생들의 학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네요.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한 집안 형편상 정주영은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 되었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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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인영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을 중퇴했고, 넷째 동생 정세영은 고려대학교를, 다섯째 동생 정신영은 독일 유학을, 그리고 막내 동생 정상영은 동국대학교를 각각 졸업하게 됩니다.


아마 정주영은 맏이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밑의 동생들을 이렇게 열심히 가르쳤고, 나중에 정주영 동생들이 분가하여 한라그룹, 성우그룹, 현대산업개발그룹, KCC그룹 등을 만든 다음에도 큰형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이유가 아닌가 하네요.


아무튼 통역장교로 일하던 동생 정인영으로부터 정보를 들은 정주영은 '미군 10만명의 임시 숙소'를 한달만에 건설했고, 또한 부산 유엔군 묘지 보수 작업에 참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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