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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이야기/김영삼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 상황

# 목차

* 깅영삼과 박철언의 대립

* 초원복집 사건과 김영삼

*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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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깅영삼과 박철언의 대립


사실 3당 합당 후에 김영삼은 '정치적인 위기'에 자주 처해지게 됩니다.

구 민정계 세력 (특히 박철언)이 김영삼을 흔들기 위하여 갖은 모략을 펼쳤기 때문이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내각제 합의문' 복사본 공개 사건이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영삼은 본인의 정치적인 생명을 걸고 '내각제 합의 백지화'와 라이벌 박철언을 일선에서 후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당시의 상황이 워낙에 복잡해서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기가 힘든데, 만약 김영삼이 아니었다면 그냥 민정계의 공세에 '김영삼의 정치 생명'이 끝났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음)


결국 겨우 김영삼은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이 됩니다.

김영삼 노태우 사진

* 초원복집 사건과 김영삼


참고로 이때 김영삼과 김대중, 정주영의 3파전이 벌어졌고, 김기춘의 초원복집 사건으로 '지역 감정을 유발'하여, 부산과 경남에서는 김영삼에게 압도적인 몰표가 쏟아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부산 경남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 감정을 부추긴 세력을 적극 지지했고,

훗날 새누리당 (구 한나라당)에서는 이때의 '기분 좋은 추억'을 잊지 못하고, '지역감정 유발 발언'을 시시때때로 하게 되었으니까요.


(사실 수구 보수에게 '지역감정 유발'과 '색깔론'은, 본인들의 실정을 덮어주는 '전가의 보도'나 다름이 없음)


아무튼 큰 표차로 김대중과 정주영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임기 초반부터 개혁을 밀어붙입니다.

이 덕분에 한때 김영삼 지지율이 90%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죠.


이제부터 김영삼의 업적 리스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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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


제일 첫번째 업적은 군부 세력 척결입니다.

사람들은 하나회 척결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 김영삼은 청와대 외곽의 30경비단을 서울 외곽으로 철수를 시킵니다.


당시 30경비단의 명목은 '청와대 호위'였지만, 사실은 군부 세력이 언제든지 청와대를 칠 수 있는 '목앞의 비수' 역할을 했었죠.


아마 김영삼의 카리스마와 결단력이 아니었다면, 30경비단 철수부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하나회 척결입니다.


유시민이 말하는 김영삼 대통령 업적


사실 김영삼 덕분에 우리나라 정치는 군부 세력으로부터 안전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많은 중진국들이 민주화에 성공하더라도,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자주 일으키면서 정치가 굉장히 불안한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만큼은 그 '싹'을 김영삼이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군부 세력이 함부로 준동하지를 못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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