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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이야기/이회창

이회창 가계도 집안 -엘리트주의의 이유

이회창에 대한 연재글 9개입니다.

이회창 가계도 집안을 살펴보면, 그가 왜 엘리트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가 잘 나타나죠.


# 목차

* 이회창 집안 친가쪽

* 이회창 집안 외가쪽

* 이회창 젊은시절 판사 생활 평가

* 이회창 전두환 관계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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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 집안 친가쪽


참고로 이회창 집안은 굉장히 화려합니다.


우선 이회창의 큰아버지 이태규 박사는 우리나라 출신의 세계적인 물리학자였고, 이회창 아버지 역시 일제 시대 검찰 서기로 근무하다가 1949년 서울지검 검사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후에 광주지검장과 법무부 교정국장 등까지 승진함)


그리고 이회창의 형 이회정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과거 삼성의료원 병리학과장을 맡았고, 동생 이회성은 에너지 경제연구원장을, 또다른 동생 이회경은 미국 뉴욕 주립대에서 계량경제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회창 가계도 집안)

이회창 젊은시절 과거 사진

* 이회창 집안 외가쪽


그 외에 이회창의 외가 역시

전남 단양의 천석꾼 가문에, 외삼촌 3명은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을 정도였습니다.(이회창 가계도 집안)


훗날 이회창은 엘리트주의로 큰 비판을 받는데, 이런 명문가 집안의 출신 내력 역시 이회창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것 같네요.



이후 이회창은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 법대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서울대 재학중인 1957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군 본부 법무관으로 복무를 한 다음에 공군 대위로 예편을 했으며, 1960년에 서울 지방법원 판사로 임용이 됩니다.

이회창 군대 사진

* 이회창 젊은시절 판사 생활 평가


이회창의 판사 시절은 그런대로 무난합니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자, 당시 사법부는 유신 찬성과 반대로 나뉘었는데, 이회창은 어느쪽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또한 1972년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이때 이회창은 군사정권에 반대되는 소수 의견을 자주 냈는데, 당시 박정희 정권의 '눈에 가시'로 여겨지게 되었죠.


반면에 이회창은 박정희 정권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판결을 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회창은 1973∼75년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6~81년 서울고등법원부장판사 등을 역임하는 등, 요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견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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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 전두환 관계


그러다가 이회창은 전두환 정권에서 1986년 4월 대법관 연임에 실패하게 됩니다.

당시 이회창의 경력 정도면 재임용이 당연시되었기에, 이를 두고 '이회창이 수모를 받았다'라는 평가였습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1988년 이회창은 다시 대법관으로 복귀했고, 또한 선거관리위원장으로도 겸직을 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이회창은 서울 영등포구 을 재선거와 동해시 재선거에서 후보 전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노태우 대통령의 서한을 문제시했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경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죠.


결국 이 때문에 이회창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자리에서 스스로 퇴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법관으로는 그대로 활동하면서,'대쪽 판사'라는 이미지가 공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 출범 후, 이회창은 감사원장으로 임명되어서, 당시 센세이션이 일어날 정도의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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