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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이야기

유은혜 의원 출신 학교,유은혜 국회의원 계파 이야기

(1/3) 총 3개의 글중 첫번째 글


유은혜 의원 출신 학교부터, 유은혜 국회의원 계파 문제까지 짚어봅니다.


과거 유은혜가 왜 운동권이 되었는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네요.


(유은혜 은수미)

은수미에 대한 포스팅 (새창보기)

은수미 고문-알몸이 되자 무너져,사노맹 사건전후


(스폰서 링크)


# 목차

* 유은혜 어린 시절

* 유은혜가 운동권 학생이 된 이유

* 유은혜 노동 운동을 하면서

* 유은혜 계파 설명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국회의원 유은혜는 1962년 10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유은혜 고향 서울). 올해 55살이죠(유은혜 나이).

(유은혜 학력 학벌) 휘경초등학교, 동대문여자중학교, 송곡여자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학사, 이화여자대학교 정책과학대학원 공공정책학 석사(유은혜 의원 출신 학교)

(유은혜 국회의원 프로필 및 경력) 1998년 국회의원 김근태 후원회 사무국장


2001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2002년 김근태 국회의원 보좌관

2004년 열린우리당 부대변인

2008년 제18대 총선 통합민주당 비례대표 19번으로 출마(낙선)

2012년 제19대 총선 민주통합당 고양시 일산동구에 출마 당선


국회의원 유은혜 사진


* 유은혜 어린 시절


유은혜는 어릴 적에 유복한 환경과 가난한 환경을 두루 경험합니다.


유은혜: "아버지가 은행 지점장이셨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시기도 있었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보증으로 크게 사기를 당하시면서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약 6~7년 정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유은혜 아버지 직업 은행원)


유은혜: "고등학교때까지 내 꿈은 교사였을 정도로 평범하게 자랐다.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박정희 외에 우리나라의 (다른)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유은혜: "그래서 10.26 이후 국상을 치를 때도 굉장히 두렵고 슬펐다. (고등학생때는) 이 상황 전체를 정치적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었다."


유은혜: "그리고 1981년도에 대학을 입학했는데, 그 전해인 1980년에 나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언론에서 단순히 '일부 불순 세력들의 체제 전복 기도'라는 보도만을 했다."



* 유은혜가 운동권 학생이 된 이유


유은혜: "그런데 대학 입학 후 한달만에 충격적인 사건을 보게 되었다. 선배 한 명이 굴뚝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렸다. (80년에) 광주 시민들이 무참하게 총칼에 수많은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인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유인물이 미처 읽기도 전에 (학내 사복) 경찰들이 (번개처럼와서) 그 선배의 머리채를 잡고 개처럼 끌고 가더라."


유은혜: "그때부터 '학교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경찰들이 왜 학교에 있는거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유은혜: "결국 그 일을 계기로 광주의 진실이 궁금해졌다. 당시에는 워낙 광주에 대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교회, 성당 등의 종교 단체가 보관하던 기록물들, 외신 자료들을 통해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유은혜: "그동안 '내가 속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세대들은 거의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시위에 나가게 되었지만) 늘 두려웠다. 그전까지는 내가 경찰서에 가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시위에 참가하면서 매번 두려움과 맞닦뜨리게 되었다."


유은혜: "2학년(1982년)때는 가두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결국 경찰에 잡혀들어갔다. 여자이고, 또 초범(?)이라는 이유로 하루만 있다가 풀렸났는데, 당시 남자 동기들은 강제 징집을 당했다. 그중에 한 친구는 독자이자 병약해서 이미 군면제를 받은 상태였는데, 그 친구도 결국 (군대로) 끌려갔다."


유은혜: "그리고 다음해에 (군대에서) 죽었다. 그냥 '자살했다'는 식으로 유족들에게 통보되었는데, 사실 그럴 정황이나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사실 이 당시 강제 징집을 당했던 많은 대학생들이 의문사를 당하게 됩니다.



* 유은혜 노동 운동을 하면서


이후 유은혜은 노동 운동에 투신하여, 약 2년동안 공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유은혜: "처음에 봉제공장에 자원해서 갔다. 내가 또래 친구들보다 체력도 좋고 건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목하나 정도 더 있을 정도로 큰 키였기에, 노동에 대한 서툰 몸놀림이 사람들 눈에 잘 띄었다."


유은혜: "결국 두세차례 (위장 취업인 것이) 발각되어서 (공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에 전자공장으로 옮겼는데, 다행히 여기서는 납땜을 앉아서 했기 때문에, 그나마 사람들 눈에 잘 도드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유은혜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남편과 결혼하게 됩니다.

(유은혜 남편 장안식 첫만남과 현재 직업 등은 밑에서 설명)


유은혜 의원 사진


* 유은혜 계파 설명


그리고 유은혜는 성균관대 민주동우회 사무국장을 하면서 고 김근태 의장(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을 만나서 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김근태 당시 국회의원의 보좌관 등을 역임하면서 김근태로부터 정치를 배우게 돼죠(유은혜 김근태 관계).


유은혜: "'김근태'라는 사람은 우리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의 대표성을 가진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김근태 의장처럼 원칙과 철학이 분명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분이 만약 우리나라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의 사회를 바꿔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에 뒷받침했다."



유은혜: "그런데 2002년 열린우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에, 김근태 의장은 양심 고백으로 중도사퇴를 했다. 그리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내가 직접 정당에 들어가(국회의원이 되어서) 김근태 의장과 함께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힘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04년 1월 열린우리당 (당직자) 공채 1기로 당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유은혜: "김근태 의장은 단한번도 한 번도 당신의 원칙과 신념을 포기한 적이 없었던 분이다. 그분을 통하여 정치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을 축복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유은혜는 김근태에 의하여 정치를 시작했고, 이후에도 김근태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유은혜를 김근태 계파라고 분류를 했죠.(유은혜 계파 김근태 이유)


유은혜에 대한 이야기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 새창보기, 2/3)

유은혜 남편 장안식 직업과 연매출6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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