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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김호경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심수봉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자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10.26사건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목격했고, 그 충격과 뒤이은 정치 탄압으로 가수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죠.


결국 이런 영향으로 3번의 결혼(1번의 사실혼 포함)을 했고 2번의 이혼을 했는데, 현재 남편의 10.26과 아내 심수봉에 대한 언급이 놀랍네요.

10.26이 아내에게 미친 영향을 담담하게 언급합니다.


(왼쪽부터) 심수봉, 심정순(할아버지, 중고제의 최고수_, 심상건(5촌 당숙, 가야금 명인 사진)


가수 심수봉(본명 심민경)은 1955년 7월 11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납니다(심수봉 고향). 올해 60살이죠(심수봉 나이).

(심수봉 종교) 원래 불교였다가 기독교로 개종

(심수봉 학력 학벌) 인화여자고등학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심수봉 프로필 및 경력)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자작곡)'로 데뷔


사실 1976년 '여자이니까'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데뷔곡입니다.


이후 아낌없이 바쳤는데,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무궁화, 사랑밖엔 난 몰라, 비나리, 백만송이 장미, 여자라서 웃어요 등의 주옥같은 명곡들을 발표하며 국민가수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본의아니게 정치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이런 성과를 냈다는 게 정말 놀랍네요.



# 목차

* 심수봉 어린 시절과 아버지

* 심수봉의 신인시절과 청와대 술자리 접대

* 심수봉과 나훈아의 인연

* 심수봉과 박정희의 죽음

* 심수봉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3차례

*  심수봉 첫번째 남편 한기석 결별이유

* 심수봉 두번째 남편 박진섭 결별 이유

* 심수봉 세번째 남편 김호경(심수경 배우자 김호경)

* 심수봉 재혼 가정의 문제점

* 재혼 가정 문제점의 해결

* 심수봉 음악성에 대한 비판과 평가

* 심수봉의 인생


심수봉 사진


* 심수봉 어린 시절과 아버지


심수봉은 어린 시절부터 무척 기구합니다.

원래 심수봉의 어머니 장형복(이름)는 이북 출신으로 월남한 후 1951년 민속학자 심재덕과 결혼합니다. 심수봉 어머니 나이가 27살이었고, 아버지는 환갑이 다 되었을 때였죠.


참고로 심수봉 집안은 4대째 내려오는 음악 명문입니다. 심수봉 증조부가 피리와 가야금 명인인 심팔록이고, 친할아버지 심정순은 중고제의 최고수였습니다.

(중고제는 서편제, 동편제 등과 판소리의 한 갈래임)

당숙, 숙부, 고모와 이복 형제 자매들 대부분이 판소리 등에 종사하며 많은 수가 무형문화재 혹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죠.


하지만 심수봉은 이런 집안 내력을 전혀 모른채 성장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1957년 이혼을 하고는 심수봉을 혼자 키웠기 때문이죠.

(당시 심수봉이 3살이었고, 심수봉 아버지는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남)


심수봉 사진


심수봉: "저는 아버지 있는 사람이 가장 부러웠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태어나서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다. 무의식적으로 학교 앞으로 친구를 데리러 온 친구 아버지를 따라간 적도 있었다."


심수봉: "하지만 어머니가 (새아빠와) 재혼하길 바라지 않았다. 사춘기 때 모략을 해서라도 어머니의 재혼을 가로막으려 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한테 누가 접근하는 게 정말 싫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혼자 계시는 걸 볼 때마다 정말 후회된다."



이런 심수봉이지만 훗날 자신의 아이들에 의해서 같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인생이란 참 묘한 것 같네요(밑에서 추가 설명).



* 심수봉의 신인시절과 청와대 술자리 접대


어쨌든 심수봉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딸의 음악적인 재능을 알아차리고 피아노를 공부시킵니다. 전남편 집안의 국악은 멀리한 것이죠.


심수봉: "당시 국악이 대접받던 시대가 아니어서 어머니가 그쪽은 생각을 안 하셨던 모양이에요. 시집과의 교류도 없었던 것 같고요. 하지만 제가 네 살 때 음악적 재질이 있는 것을 보고는 가만 놔두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하더라고요. 국악은 오히려 최근에 배웠어요.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얼마 전까지도 집안 내력에 대해 몰랐어요. 그 사실을 알고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피내림이 있었나 봐요."


심수봉 어머니는 딸이 피아니스트나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랬지만, 심수봉은 가장이 되어서 일찍부터 밤무대에서 드럼을 치면서 생계를 꾸리게 됩니다.


심수봉: "그때 정말 고마운 분이 계셨어요. 공연에서 드럼을 치기 전에 제가 피아노를 치는 걸 듣더니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치는데 왜 드럼을 치냐. 드럼은 여자가 하기 힘들다’면서 재즈피아노라는 게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 말이 제 인생을 바꾼 거죠."


심수봉 과거 사진(데뷔 무렵)


그리고 심수봉은 1975년 21살의 어린 나이로 청와대 술자리에 불려갑니다.

심수봉: "고교 졸업 후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어느 특별한 파티'에서 '대타(代打)'로 히바리 노래 한 곡을 불렀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박종규(朴鍾圭) 대통령 경호실장의 맘에 들었나봐요. 그러고 나서 대통령 만찬 자리에 불려갔어요."


심수봉: "너무 어려서,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겁도 없이 쭐레쭐레 따라간 거예요. 그런 자리인지도 모르고. 운명이라는 게 순간적인 잘못으로 인해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살게 된 거죠."


심수봉: "처음 본 박 대통령(박정희)은 의외로 늙어 보였다. 내가 '눈물젖은 두만강' '황성옛터'를 부르자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러고 나서 히바리의 '슬픈 술(가나시이 사케)'을 부르니까 어디서 왜년을 데려왔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이어 내가 ’눈물 젖은 두만강’과 ’황성 옛터’를 부르니 그제야 박 전 대통령이 내가 한국 가수인 것을 알고 좋아했다."


심수봉 젊은 시절 사진


* 심수봉과 나훈아의 인연


이후 운명의 10.26 사건은 1979년에 발생하는데, 그동안 심수봉은 청와대 만찬(술자리)에 불려나갔고, 그외에도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당대 최고의 가수 나훈아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죠.


나훈아: "(심수봉을 보며) 이 사람 아니면 누가 가수를 하겠느냐?"


그리고 심수봉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 심양의 팬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후 나훈아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1976년 듀엣 음반을 준비하지만, 신세기 레코드 음반사와 문제가 생겨서 중간에 녹음 작업이 취소가 됩니다.



* 심수봉과 박정희의 죽음


이후 위에서 언급한대로 심수봉은 1979년 10.26의 현장에 있게 됩니다.

(당시 심수봉외에 여대생 광고 모델 신재순도 같이 불려감. 현장에 정치인으로는 박정희, 김재규(중앙정보부장 겸 저격범), 차지철(경호실장), 김계원(비서실장) 등)


이때 김재규가 심수봉을 향해서 총을 겨누기도 합니다.

심수봉: "(1차 충돌이후 총이 격발되지 않자 김재규는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옴)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온 김재규가 화장실에서 나온 차지철에게 총을 쐈고, 다시 박대통령의 머리를 쐈어요. 그리고는 당시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던 저에게도 총을 겨눴어요. 하지만 총은 격발되지 않았어요. 아마 총알이 떨어졌을 거에요."


박정희의 사망 이후, 심수봉은 전두환(당시 합동수사본부장)으로부터 강도높은 수사를 받게 됩니다.


심수봉: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계엄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나는 심령에 씌워서 그렇다고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냥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심수봉: "당시 유명한 H모 심령학자가 조사에 입회를 했는데, 심령에 씌어 헛 것을 보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심령학자 그 분도 계엄사로 끌려들어와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심수봉: "당시 우리 엄마도 (10.26 사건에 내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계엄사에서 내가 심령에 씌였다고 하도 몰아가니까 엄마도 그 말을 믿었던 거다. 그래서 엄마와 계엄사 사람들에 이끌려 그렇게 이상한 곳(정신병원)을 들어가게 됐다."


정신병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심수봉의 고초는 계속됩니다.


심수봉(모자를 쓴 여인)과 신재순(오른쪽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사진


* 심수봉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3차례


심수봉: "결국 서울 한남동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한 달간 감금당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 강제로 수면제 같은 주사를 놓았다. 약이 얼마나 독했는지 2주일 만에 깨어나 화장실 거울로 쌍꺼풀이 짙게 진 퀭한 얼굴을 보면서 ‘이대로 있다간 여기서 처참한 꼴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한달 후 심수봉은 정신병원을 나갈 수 있었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그 후유증을 겪게 됩니다.


심수봉: "중추신경이 수면제에 중독되는 바람에 정신병원을 나온 후에도 한참 동안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의 조언으로 불면증이 있을 때마다 위스키를 한잔씩 마시고 잠이 들곤 했다. 지금도 술을 일절 하지 않는데 당시에 못먹는 술을 억지로 마셨다."


이렇게 정신병원을 나온 심수봉이지만, 본업인 방송 복귀는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심수봉: "1980년 방송 정지 조치를 당했다. 내가 TV에 나오면 국민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10.26 사건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는 신군부의 생각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심수봉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은 계속됩니다.

방송 금지가 계속되는 동안 심수봉은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주제곡 OST인 '순자의 가을'을 직접 부릅니다(이 노래는 영화 외에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였음).


그런데 제목에 순자(전두환의 마누라 이순자)라는 이름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방송 및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가수 방미가 제목을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바꾸어 불러서 빅히트를 침)



1984년 방송 출연 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심수봉은 동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대와 탱고를' 발표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하지만, 1985년 발표한 '무궁화'가 문제가 되어서 다시 방송 금지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무궁화란 노래가 박정희 대통령을 연상시키고 국민을 선동한다고 생각함)


심수봉: "나의 노래 가운데 '무궁화'는 유일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것은 아니다."


심수봉: "10·26 직후 조사를 받고 방송 활동을 금지당하면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박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 첫아이를 낳았고, 아이 얼굴을 보면서 '이 아이가 행복할까'를 생각했다. 밖에서는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피기 전에 지는 꽃이 있다. 사회에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다. 그때 한국의 국화, 무궁화가 떠올랐다. 피고는 지고, 그리고 또 몇 번이고 피는 꽃을…."



결국 심수봉은 다시 정치적인 탄압을 받고 가수 활동을 접게 됩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무렵인 1987년 "사랑밖엔 난 몰라", "이방인"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합니다.


특히 '사랑밖엔 난 몰라'는 자신에게는 정치색이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는 심수봉의 외침이 아니었나 합니다.



*  심수봉 첫번째 남편 한기석 결별이유


어쨌든 심수봉은 이렇게 굴곡 많은 가수의 삶을 살았는데, 그녀의 인생 역시 비슷합니다. 아니 10.26과 이후의 정치적인 탄압때문에 개인사가 영향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죠.



심수봉: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곧 저에 대한 방송출연 금지가 내려졌어요. 제가 나오면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이유였죠. 처음엔 어리둥절했다가 정말로 방송출연이 막혀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자 분노가 치밀더라고요."


당시 심수봉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간 모습을 직접 목격했고, 김재규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기도 했습니다. 가혹한 조사와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죠.

아마 정신적인 고통이 상당했을 것 같네요.

이런 시기에 그녀에게 버팀목이 생겼죠.

바로 심수봉 전남편 한기석(일명 한도사)입니다.


심수봉: "우연히 지인들에게 10·26 사건을 예언한 심리학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그분으로부터 정신 치료를 받았고,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도 했어요. 당시 세간에선 그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사기꾼이나 그런 분은 아니었어요."


심수봉: "다만 같이 살아보니까 저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그 분은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한 1년 정도 살다 큰아들을 낳고 보름 만에 갓난 아이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왔죠."(심수봉 전남편 이혼사유, 이혼이유)


한기석은 1949년 3월 17일생으로, 심수봉보다 6살 연상이었죠(심수봉 첫남편 한기석).

당시 세간에는 심령으로 사람을 미혹시킨다는 루머가 많았는데, 심수봉은 나중에도 그에 대하여 상당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네요.



심수봉은 첫번째 남편 한기석과 1980년 동거를 했고, 이것이 대중에 알려진 이후에 약혼을 합니다(사실혼 관계임).

그리고 심수봉 한기석 사이에 큰아들 한승현(1981년생 7월 9일)이 태어납니다.

(심수봉 자녀 자식)(심수봉 가족 관계)



당시 한기석은 전처와 1남 1녀가 있었는데, 서둘러 이혼하고 심수봉과 동거를 하게 되었고, 심수봉의 어머니는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심수봉이 많은 심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또한 10.26 사건 이후 심수봉은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에, 때때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합니다.

심수봉: "10·26사태 이후 계속 감시를 받아왔는데, 심령학자였던 첫 남편이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심수봉: "(내가 갇혀 있던) 바로 옆방에서 남편이 전기 고문을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 알고 있는 분이 고문을 당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돌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결국 심수봉의 고백처럼 심수봉은 1981년 그와 이혼하게 됩니다.



* 심수봉 두번째 남편 박진섭 결별 이유


그리고 1983년 심수봉은 사업가(유흥업소 사장) 박진섭(1952년생)을 만나서 재혼합니다(심수봉 두번째 남편 직업 사업가)(심수봉 재혼).

심수봉이 출입하던 밤무대의 사장이었는데,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다가 서로 인연이 만들어진 것이죠.


심수봉은 1984년에 딸 박성희(이름)을 낳게 됩니다.



이후 심수봉은 박진섭과 9년을 같이 살았지만, 성격차이로 1992년 다시 이혼하게 됩니다(심수봉 두번째 결혼 이혼사유, 이혼이유).


심수봉: "9년을 살았지만 한달에 서너 번 정도만 집에 들어올 정도로 바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부부의 잔정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 심수봉 세번째 남편 김호경(심수경 배우자 김호경)


이후 혼자 살던 심수봉은 1993년 현재의 남편 김호경(1953년생으로 심수봉보다 2살 연상)과 다시 재혼하게 됩니다.

당시 김호경의 직업은 MBC 라디오 ‘심수봉의 트로트가요 앨범’의 PD였는데, 이 둘의 인연은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심수봉: "재혼한 남편을 내가 먼저 짝사랑했어요. 아니, 처음에는 나의 착각이었죠. PD로서 MC를 굉장히 자상하게 보살펴주고 신경 써줬는데 그걸 제가 오해했던거죠. 남편이 자기가 맡은 프로그램의 MC가 양지 위에 있어야지 음지 위에 있으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양지 위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건데…."


심수봉: "그걸 착각해서 <비나리>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아휴, 말하자면 착각에서부터 시작된 게 처음엔 비극이었다가…(나중에는 결혼까지 하게 된 거죠.)"


심수봉: "비나리(노래)는 원래 가사가 부정적이었는데 친구가 그렇게 하면 사랑이 이뤄지겠냐고 해서 뒤에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라는 가사를 더 붙였어요."


심수봉: "당시 친한 친구가 나 대신 남편에게 고백했었어요. 친구가 남편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남편이 나를 찾아왔죠."


심수봉: "다행히도 남편은 제가 부르는 '비나리'를 듣고서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아요. 남편이 이 노래를 다시 듣고 싶다고 해서 8번이나 다시 불러주었다.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뻑이 간 것 같았어요."


심수봉 남편 사진은 공개하지 않음


처음에는 착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이네요.

어쨌든 '비나리'라는 명곡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흥미롭네요.

사랑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심수봉의 감수성과 음악적인 재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심수봉은 현남편 김호경과 1993년 재혼하게 되는데, 원래 김호경 역시 재혼이었습니다.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이름은 김규현(1983년생)이 하나 있었죠.


(심수봉 친자식은 1남 1녀이지만, 자녀(자식)는 2남 1녀라고 표기를 하죠.)



* 심수봉 재혼 가정의 문제점


이렇게 겨우 짝사랑을 이룬 심수봉이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가 않습니다.

바로 자녀 문제때문이죠.


심수봉: "전 남편(두번째 남편 박진섭)과 낳은 딸과 이혼 후 헤어지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딸이 유모를 통해 연락을 했다. 핑클 사인을 받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1998년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원래 심수봉 큰아들 한승현은 심수봉이 쭈욱 키우지만, 딸이었던 박성희는 그렇지가 못했죠.

그러다가 2001년부터 심수봉은 딸도 함께 살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심수봉: "딸아이와의 이별은 제 입장에서 봤을 땐 아이를 빼앗긴 거였어요.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딸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며 자랐죠. 자신이 가장 엄마를 필요로 할 시기에 옆에 있어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미움이 컸던 것 같아요."


심수봉: "처음 왔을 때 ‘저 남자(현재의 남편 김호경) 나가라고 하고 나랑만 살면 안되냐’고 하더라고요. 남편도 딸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고요. 둘 사이에서 제가 못살겠더라고요. 오죽하면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겠어요. 미국으로 갈 때의 참담한 심정이란 말도 못하죠."


결국 심수봉은 현재의 남편과 9년 정도 떨어져서 지내게 됩니다.

심수봉 아들 한승현 역시 재혼 가정의 문제점을 겪게 됩니다.


심수봉: "당시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재혼을 했다(1993년). 그런데 나는 이상형을 만나 행복하고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꿈꿨지만 아들은 아니었다."


심수봉 아들 사진(심수봉 가족 사진)


한승현(심수봉 큰아들): "어머니가 재혼 후 막내 여동생이 아버지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다. 때문에 9년 정도 헤어져 살아야 했다. 반면 둘째 동생(김호경의 아들 김규현)은 새 아버지가 데려오신 자식이다. 지금은 정말 친해졌지만 어릴 땐 배다른 동생이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던 것 같다."


한승현: "사실 당시 새 아버지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면 어머니에게 SOS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그러한 것들을 겪어야 할 과정으로 여기고 한 발 뺐었다.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게 됐고, 그러다보니 집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결국에는 게임 중독 상태에 빠져서 일주일 내내 잠도 안 자고 게임만 했었다. 3년이 지나서야 게임중독을 겨우 고칠 수 있었다."



심수봉 자식들이 어머니의 재혼으로 정신적인 방황이 컸던 것 같습니다.

특히, 딸의 모습은 심수봉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재혼을 반대했던 모습과 겹쳐 보이네요.

(현재 심수봉 큰아들은 모 회사 CEO이고, 둘째 아들은 대학교에, 막내 딸은 첼로를 전공했다가 다시 연기를 공부하고 있음)



* 재혼 가정 문제점의 해결


이런 재혼가정의 문제점을 심수봉은 시간을 두고 해결합니다.


심수봉: "전 아이의 상처를 완전히 씻어주려면 떨어져 있던 기간 만큼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노력하면 딸아이도 제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죠."


심수봉: "결국 2002년 유학을 겸해 딸과 함께 미국으로 가 2년 동안 생활했어요. 거기 가서도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아이가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이의 마음이 열리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아이도 제가 가족과 떨어져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렇게 엄마의 사랑을 받게 되자, 딸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 같네요.



* 심수봉 음악성에 대한 비판과 평가


일각에서는 심수봉에 대해서 10.26으로 먹고 사는 가수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수봉의 음악성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죠.

심수봉은 자신의 대표곡 대부분의 직접 작사 작곡한 싱어송 라이터입니다.

또한 시대가 막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화려한 명성을 구가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였죠.


심수봉: "저는 데뷔 때 말고는 화려하게 떠본 적이 없어요. 상도 데뷔 때 10대가수상을 받은 것 외에는 못받았죠. 항상 노래 외적인 일로 시련을 겪어 대중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노래를 많이 부른다는 건 알았지만 인기를 실감하진 못했어요. 솔직히 저도 전성기라는 게 있어봤으면 좋겠어요."


또한 광고 역시 종종 좌절됩니다.


심수봉: "예전에  어떤 CF 섭외가 진행되다가 엎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우리 신랑이 그러는 거예요. ‘그럴 거야. 10ㆍ26에 대한 게 너무 강해서 어떤 CF도 그걸 뛰어넘을 수가 없을 거야. 10ㆍ26이 딱 가리고 있는데 (광고에서 심수봉을 보는 것이) 얼마나 께름칙하고 찜찜하겠어?’라고요."


심수봉: "그동안 몰랐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걸(10.26사건) 굉장히 안 좋게 생각하겠구나 싶더군요."


즉, 대중들은 심수봉을 볼때마다 10.26을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수봉 남편이 이런 점을 냉철하게 잘 짚었네요.

아마 오랫동안 라디오 PD를 하면서, 다져진 시각인 것 같습니다.


사실 심수봉이 노래를 부를 때 10.26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심수봉 노래의 진가를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죠. 딴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수봉이 대단한 것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러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 심수봉의 인생


심수봉의 인생은 평가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개인적인 문제는 개인의 노력이나 가족의 도움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심수봉의 경우는 개인의 힘을 훨씬 뛰어넘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이죠.


다만 이 때문에 처음에는 좌절과 방황을 많이 한 심수봉이지만, 후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심수봉: "예전에는 10ㆍ26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요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희생자가 돼서 어려움을 겪나 괴로워했는데, 지금은 이런 경우가 나니까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즉, 견딜 수 있는 사람에게 일어난 거라고 생각해요."


심수봉: "그날 같이 있었던 신재순씨라고 있잖아요(1983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감). 미스 신이 미국 LA에 살아요. 미국으로 공연 갈 때마다 분장실에 나타나는데, 늘 눈이 빨개져서 와요. 재순씨만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언니 언니, 해가며 옛날 얘기를 하죠. 지난해 10월에 LA 공연을 갔을 때도 둘이 호텔에서 시간을 갖고 그 얘기를 했어요."



누구나 불가항력적으로 큰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수봉처럼 담담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네요.

물론 그녀도 이런 마음의 평안을 찾기까지 무척 많은 시간을 고통속에서 보냈죠.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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