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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김병만 생활고 고백, 가난한 집안 장남의 책임감

김병만은 무척 특이한 개그맨입니다. 대개의 개그맨처럼 입담이 뛰어나서 시청자의 배꼽을 빼는 개그맨이 아니고, 오히려 성실성과 꾸준함으로 시청자들에게 은근한 미소와 감동을 주는 특이한 개그맨이죠.

 

그의 달인 캐릭터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이게 개그인지 실전 묘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입담말고 이런 김병만식 진지 코드를 좋아하는 팬들도 많이 있습니다.

  

 

김병만은 1975729일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태어납니다(고향). 올해 나이가 40살이죠.

어릴 적부터 김병만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부터 어느 정도 가난했고, 또 아버지의 책임도 약간은 있습니다.

   

김병만: "아버지가 어머니 말은 안 들으면서, 남의 얘기에는 귀가 얇았어요. 큰아버지들이 하는 말에 혹해서 땅 판 돈 다 말아먹고 결국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쫓겨 가다시피 해서 살았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어머니는 식당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며 상경했고, 저도 연극을 하겠다고 서울로 왔죠. 그렇게 10년을 어머니가 식당일을 하며 생활을 꾸리셨어요. 손톱이 다 닳아 뭉개질 정도로 일을 많이 하셨어요."

 

 

원래 김병만의 어머니가 몸이 성치 않은데, 식당일을 하면서 몸이 더 망가집니다.

김병만: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자궁암 수술을 받으신 후 계속 골다공증을 앓고 계세요. 아버지 임종때 무릎도 꿇지 못할 정도였죠. 지난해에는 갑산성암으로 또 수술 받기도 했어요.

골다공증이 심해 지금도 뒤뚱뒤뚱 걸으시는데, 수술하면 더 안 좋아질까 봐 말리고 있어요. 손 쓸 수 있는 데까지 써보고 수술하려고 해요."

 

그런데 김병만은 아버지에게도 어느 정도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김병만: "아버지는 항상 제가 졸업하자마자 바로 일을 해서 빚 갚는 데 도움을 줬으면 하셨어요. 근데 취업 후 일을 해보니 평생 벌어도 못 갚을 액수더라고요. 그래서 '이럴 바에는 모험을 한번 걸자.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하자'는 뜻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리더라고요. 아버지는 일 좀 도와달라고 하시고... 화가 났어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며 사는 게 싫었어요. 진절머리가 났죠."

 

 

가난한 집안 맏이로 태어났던 김병만이 어느 정도 속이 상했는지 알 수 있을 거 같네요.

그러다가 김병만은 개그맨이되기 위해서 대학 시험에 도전하다가 6번이나 떨어지게 됩니다. 이미 고등학교 재학 시절 대학을 포기하고 기술자의 삶을 택했기 때문에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았던 상황이었죠.

 

하지만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2002년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에 입학했고, 후에 동양대학교 영상학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등을 나오게 됩니다.(김병만 학력)

그리고 2002KBS 17기 공채 개그맨 시험에도 합격해서 개그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이때의 이야기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 책(제목) '꿈이 있는 거북이는 지치지 않습니다'에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김병만: "(개그맨 지망생 시절) 공중화장실에서 몸을 씻다가 알몸으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오디션 탈락에 수면제도 모으고 건물 옥상 난간에 서보기도 했습니다."

 

자살까지 생각했다니, 김병만의 좌절감이 굉장히 컸던 모양이네요.

하긴 고향에서는 아버지가 빚더미에 깔려 있고, 서울에서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의 건강은 갈수록 안 좋아지는 상황이니, 당시 김병만은 암담할 수밖에 없죠.

김병만: "집안의 형편 악화로 당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김병만은 자신의 키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김병만 실제 키 158.7cm, 보통 159cm라고 부릅죠. 사실 사람의 키는 아침 저녁으로 약간씩 변합니다.)

 

 

김병만: "가난과 작은 키 때문에 부모님 원망한 적 있다.

개그맨 시험을 처음 봤을 때 너무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나온 일화가 있다. 그때 힘들어서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있다."

 

김병만: "그 순간에 어머니가 미안해라고 하셨다."

아마 그 말을 듣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김병만 역시 이 말을 입밖에 내자마자 후회했을 것이고요.

 

김병만: "지금은 작은 키도 감사한다. 작은 키로 뭔가를 이뤘을 때 시청자들도 더 좋아하고 박수쳐 주시는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겪던 김병만이 2007129일 처음 전파를 타게 되는 달인 캐릭터로 인기를 끌게 됩니다. (나중에 20111113일까지 4년간 개그콘서트 최장수 코너가 됨)

이때서야 비로서 수입이 풍족해진 김병만은 아버지의 빚을 완전히 갚고 흑자가 됩니다.

 

하지만 김병만은 집안의 맏아들이었고, 그는 모두를 보듬어 안아야 했습니다. 4남매중에서 아랫 동생이 결혼해서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지만 형편이 별로 넉넉하지 않습니다.

손위 누이는 이혼 후 아이 셋을 키우며 혼자 생활하고 있고, 막내 여동생 역시 이혼해서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됩니다(김병만 가족관계).

다른 가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하는 형편인 거죠.

 

게다가 조카딸마저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김병만: "동생이 이혼을 해서 내가 조카를 키우고 있다. 동생은 돈을 벌러 가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어릴 적에 어렵게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조카가 상처 받는 게 싫어 내가 직접 키우기로 했다."

(2008108, 남희석 최은경의 여유만만에서 김병만의 고백)

 

 

요즘 아빠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육아 버리아이어티가 유행이긴 한데, 김병만은 벌써 5~6년 전에 어쩔 수 없이 조카딸 육아를 했네요.

아버지 대신에 맏아들인 김병만이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김병만은 결코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김병만 정글의 법칙 사진

 

아마 이런 어린 시절과 가정 환경때문에 김병만은 화려한 입담보다는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묵묵한 성실성을 갖게 된 거 같습니다.

(아마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도 달인때처럼 단번에 성공해 버렸을 거 같네요.)

 

어쨌든 청년 시절을 그런 고통 속에서 보낸 김병만이기에, 오늘날 청년들에게 해줄 말 역시 많습니다. (그의 책에서 발췌)

김병만: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여기까지 왔잖아. 뛰지는 못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 기어서 왔어. 한순간에 확 뜨는 사람은 중간에 여유를 부릴 수 있겠지. 나는 기어서라도 내 목표까지 가는 거잖아."

 

 

"(꽃이) 제대로 피기 위해, 빨리 시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계속 가꾸고 물을 줘야 합니다. 누구보다 뒤처져서 더 이상 뒤처질 게 없던 출발지점보다 지금의 순간이 더 노력할 때라는 것을 잘 압니다."

 

말로 웃기는 것보다 이상하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김병만이 앞으로 좀 더 행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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